유럽 에어컨 시장은 한동안 ‘언젠가 커질 시장’에 가까웠어요. 여름이 더워져도 오래된 건물 구조, 까다로운 실외기 설치, 낮은 보급률 때문에 가전업체가 쉽게 치고 들어가기 어려웠죠. 그런데 올해 40도 안팎의 폭염이 이어지면서 계산이 달라졌습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유럽에서 에어컨과 냉난방공조 제품 판매를 키우는 흐름은 단순한 계절 특수가 아닙니다. 핵심은 “더운 날씨에 에어컨을 더 판다”가 아니라, 실외기 하나를 어디에 놓을지조차 까다로운 시장에서 어떤 제품 구조가 먹히느냐예요.
유럽 에어컨 수요를 막아온 건 더위가 아니라 건물 구조
유럽은 여름 기온만 보면 에어컨이 당연히 많이 팔릴 것 같지만, 실제 보급률은 낮은 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현실적입니다. 오래된 공동주택과 보존구역이 많고, 외벽에 실외기를 다는 일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프랑스처럼 공동주택 관리조합 승인이 필요한 곳도 있고, 영국·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처럼 건물 외관과 설치 기준을 까다롭게 보는 지역도 있습니다. 한국 아파트처럼 “실외기실에 넣으면 끝”이라는 방식이 잘 통하지 않는 셈이죠.
이 구조에서는 가정용 벽걸이 에어컨을 많이 파는 것만으로 시장을 크게 키우기 어렵습니다. 제품 성능보다 설치 허가, 배관, 기사 인프라, 건물 훼손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유럽 에어컨 전쟁의 초점은 소비자용 한 대 판매보다 ‘건물 전체를 어떻게 식힐 것인가’에 더 가깝습니다.
실외기 한 대에 실내기 64대, 호텔과 대형 건물이 먼저 움직인다
삼성전자가 이탈리아 호텔에 공급한 대형 시스템 에어컨 사례가 눈에 띄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실외기 한 대로 최대 64대 실내기를 연결하는 방식은, 외벽 훼손을 줄이면서 여러 공간을 한 번에 관리하려는 유럽 건물 환경과 잘 맞습니다.
호텔, 쇼핑센터, 신규 대단지처럼 냉방 수요가 크고 시설 투자가 가능한 곳에서는 이런 구조가 유리합니다. 외부에 실외기를 여러 대 붙이는 대신 중앙에서 묶어 관리하면 디자인과 허가 문제를 줄일 수 있고, 에너지 효율 관리도 쉬워집니다.

▲ 오래된 건물은 실외기 설치가 가장 큰 장벽입니다.
▲ 신규 대형 건물은 중앙 공조와 시스템 에어컨 도입 여지가 큽니다.
▲ 전기요금이 비싼 지역일수록 냉방 성능보다 효율과 운영비가 중요해집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에어컨 성능’보다 ‘우리 건물에 설치가 가능한 제품인가’가 먼저입니다. 유럽 시장에서는 바로 이 설치 조건이 브랜드 선택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LG가 보는 방향은 이동식 에어컨과 히트펌프의 동시 공략
LG전자는 유럽에서 히트펌프와 이동식 에어컨을 함께 밀고 있습니다. 히트펌프는 겨울에는 난방, 여름에는 냉방으로 쓰는 방식이라 유럽의 에너지 전환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단순 냉방기라기보다 집 전체의 냉난방 구조를 바꾸는 장비에 가깝죠.
반대로 이동식 에어컨은 설치 장벽을 낮추는 제품입니다. 실외기 설치가 어렵거나 임대주택처럼 공사 부담이 큰 환경에서는 “벽을 뚫지 않아도 되는 냉방기”가 현실적인 대안이 됩니다. 올해 LG가 유럽향 이동식 에어컨을 내놓은 것도 이 흐름과 연결됩니다.
물론 이동식 에어컨은 시스템 에어컨처럼 넓은 공간을 안정적으로 식히는 제품은 아닙니다. 대신 침실, 작은 거실, 재택근무 공간처럼 당장 더위를 피해야 하는 방에는 빠른 선택지가 될 수 있습니다.
유럽 에어컨 시장이 재미있는 건 여기서 갈립니다. 프리미엄 시스템 공조는 대형 건물과 호텔을 향하고, 이동식 제품은 개인 소비자의 당장 필요한 냉방 수요를 파고듭니다. 삼성과 LG가 같은 시장을 보면서도 다른 입구를 두드리는 셈입니다.
삼성·LG 가전 경쟁은 가격보다 설치 인프라 싸움으로 간다
한국 가전업체가 유럽 폭염을 기회로 보는 건 자연스럽지만, 이 시장은 제품만 잘 만들어서는 부족합니다. 설치 기사, 사후관리, 지역별 규제 대응, 건물주와 관리조합 설득까지 함께 따라가야 합니다.
에어컨은 스마트폰처럼 택배로 받고 바로 켜는 제품이 아닙니다. 특히 유럽처럼 건물마다 규정이 다른 시장에서는 판매 이후의 설치 경험이 브랜드 이미지로 이어집니다. 소비자가 체감하는 건 스펙표의 냉방 능력보다 “언제 설치되고, 얼마나 조용하고, 전기요금이 얼마나 덜 나오느냐”입니다.

삼성은 대형 시스템 에어컨과 스마트싱스 기반 관리 솔루션을 앞세울 수 있고, LG는 히트펌프와 HVAC 제품군에서 쌓아온 경험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최근 발행한 삼성 AI가전 캐시백 글에서도 보였듯, 가전 경쟁은 이제 제품 단품보다 앱, 에너지, 관리 서비스가 묶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공식 제품군을 보면 삼성전자는 유럽 시장에서 다양한 에어컨 제품군을 운영하고 있고, LG전자도 냉난방공조 솔루션을 별도 축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이번 폭염은 그 흐름을 더 빠르게 만든 촉매에 가깝습니다.
폭염이 만든 새 가전 시장, 한국 업체가 먼저 잡을 틈
이번 이슈의 출발점은 유럽의 기록적인 폭염이지만, 더 큰 변화는 생활 인프라의 기준이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유럽에서 에어컨은 없어도 버틸 수 있는 장비였지만, 폭염이 반복되면 주택과 상업시설의 기본 설비로 올라설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때 시장을 잡는 건 단순히 가장 차가운 바람을 만드는 회사가 아닙니다. 오래된 건물에 맞는 설치 방식, 전기요금을 줄이는 효율, 소음, 유지보수, 대형 건물과 개인 소비자를 나눠 공략하는 제품 구성이 더 중요해집니다.
삼성·LG에 유럽 에어컨 시장은 스마트폰처럼 매년 모델을 바꾸는 시장은 아닙니다. 한 번 들어가면 호텔, 주거단지, 상업시설 단위로 오래 남는 장비 시장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폭염 특수는 일회성 판매보다, 유럽 냉방 인프라가 어떤 브랜드로 깔리기 시작하느냐를 가르는 초반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