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정신과 초진 면담을 맡는다면? KAIST·세브란스가 개발한 ‘AI 인터뷰어’
병원에 처음 방문하는 건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정신과는 그 문턱이 더 높다. 마음의 상처를 낯선 사람에게 털어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의사 입장에서도 제한된 진료 시간 안에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부담이 크다. 초진 면담 하나에 보통 15~20분이 할당되는데, 그 안에 병력 청취부터 증상 평가까지 해내야 한다. 시간이 부족하면 중요한 정보다 누락되기 쉽고, 환자는 충분히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KAIST와 강남세브란스병원 연구팀이 흥미로운 기술을 내놓았다. 바로 거대언어모델(LLM)을 활용한 정신과 초진 면담 지원 시스템이다.
환자가 의사를 만나기 전, AI가 먼저 대화한다
카이스트 전산학부 이의진 교수와 산업디자인학과 이탁연 교수 연구팀, 그리고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은주 교수 연구팀이 공동 개발한 이 기술의 핵심은 간단하다. 환자가 의사를 만나기 전에 AI와 먼저 대화하며 자신의 상태를 정리하는 것이다. 의사는 AI가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심층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다.
기존에도 문진표나 설문지를 활용한 사전 정보 수집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기술의 차별점은 AI가 실제 상담사처럼 대화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연구 결과는 이미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분야 최고 권위 학회인 ACM CHI 2026에 발표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기존 문진과 완전히 다른 면담 방식
기존의 정신과 문진은 보통 체크리스트 형식의 질문에 환자가 답하는 방식이었다. 질문이 정해져 있어 환자의 상태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다. 하지만 연구팀이 개발한 AI 인터뷰어는 훨씬 정교하다.
환자의 답변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전문적인 정신과 지식 구조(DSM)와 대조한 뒤, 상황에 따라 다음 질문을 유동적으로 선택한다. 마치 숙련된 의사가 환자의 말을 듣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단순히 미리 정해진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수준이 아니라, 진정한 대화를 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공감 능력이다. “많이 힘드셨겠어요” 같은 따뜻한 표현은 기본이고, 재진술과 명확화 같은 실제 심리상담 기법까지 구사한다. 예를 들어 환자가 “요즘 잠을 잘 못 자요”라고 말하면, AI가 “밤에 잠들기가 어려우신가요, 아니면 자주 깨시나요?”라고 구체적으로 물으며 정확한 정보를 이끌어낸다. 환자는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편안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
수집된 모든 대화 내용은 시각화 대시보드로 정리돼 의료진에게 전달된다. 의사는 긴 대화록을 읽을 필요 없이 핵심 증상과 위험 요인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실험 결과 “수련의 수준”…효과는 확실했다
연구팀이 가상 환자 1440명을 대상으로 시스템 성능을 검증한 결과는 놀라웠다. 대부분의 케이스에서 30분 이내에 진료에 필요한 핵심 임상 정보를 확보했다. 단일 질환만 있는 경우는 10~15분 만에 필요한 정보의 90% 이상을 수집할 수 있었다. 현직 정신건강 전문의 19명이 참여한 평가에서도 AI의 정보 수집 능력이 “초기 진단을 수행하는 수련의 수준”에 달한다는 호평을 받았다.

물론 한계도 명확하다. 연구를 이끈 이의진 교수는 “정신과 면담은 환자의 답변에 따라 대화 방향을 유연하게 조정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라며 “자살 사고나 트라우마 같은 민감한 주제에서는 신뢰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AI가 미묘한 감정 뉘앙스나 개인의 서사적 맥락을 깊이 파악하는 데는 아직 한계가 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AI는 의사 대체자가 아니라 ‘견습생’ 역할
연구팀의 접근 방식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AI의 역할을 분명히 정의한 것이다. 이 AI는 의사를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다. 연구팀은 AI를 반복적인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코칭 가능한 견습생’으로 규정했다. AI가 초진 단계의 부담을 덜어주면 의사는 최종 진단과 치료 계획 수립 등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협업 모델이 실제 의료 현장에 적용되면 여러모로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환자 입장에서는 병원 방문 전에 모바일로 AI와 대화하며 증상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어 심리적 부담이 줄어든다. 의료진 역시 사전에 환자 상태를 파악한 상태로 진료에 임할 수 있어 진료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앞으로 활용 분야는 훨씬 넓다
연구팀은 이 기술이 병원 외래 진료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심리상담센터, 대학 상담소, 지역정신건강복지센터 등 다양한 현장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구체적으로는 우울증, 불안 장애, 수면 문제 등을 사전에 점검하는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부터 비대면 진료, 고령자의 정서 상태 정기 점검까지 적용 범위를 넓힐 수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실제 환자 대상 임상 검증을 거쳐 병원의 전자의무기록 시스템과 연동하는 것이다. 인간과 AI가 협력해 진료의 질을 높이는 새로운 정신건강 진료 모델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다.
정신건강 분야 AI 도입, 이제 시작이다
정신건강의학과는 그동안 디지털 전환에서 상대적으로 더딘 분야로 꼽혀왔다. 진단이 환자의 주관적 서술에 크게 의존하는 데다, 대화라는 비정형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LLM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이런 장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이번 KAIST와 세브란스의 연구는 AI가 정신건강 분야에서도 얼마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물론 실제 의료 현장에 안착하기까지는 더 많은 임상 검증과 제도적 정비, 그리고 윤리적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술의 방향성은 분명히 긍정적이다. AI가 정신과 진료의 문턱을 낮추고, 더 많은 사람이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기대해본다.
AI 기술이 의료를 넘어 다양한 산업에서 변화를 이끌고 있다. AI 검색 기술의 발전이 정보 검색 시장에 가져온 변화를 분석한 글도 함께 읽어보면 재미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AI 기술이 사회 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글도 참고하시면 좋다. 기술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앞으로 다가올 변화에 대비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